짧은시

압화

따뜻한 글쟁이 2025. 11. 21. 11:34

 

꽃은

한번 피고 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 했지만

 

나는

그 이치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책장 사이에 봄을 눌러 두었다

 

시들어가는 시간 위에

손바닥의 온도를 얹어

색을 붙잡고

향을 잊고

형태만 남겼다

 

사라짐이 두려운 사람은

붙잡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붙잡는다는 것은

움켜쥐는 게 아니라

고요히 눌러놓는 일

 

압화는

꽃을 죽이는 기술이 아니라

기억을 다르게 살리는 기술이다

 

흔들리던 꽃잎이

평평해지는 동안

흔들리던 마음도

서서히 숨을 고른다

 

꽃은 피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다시 시들지 않아서 아름답다

 

지나간 순간은 돌아오지 않지만

다른 방식으로 남을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한 겹의 꽃잎을 눌러본다

나를 아프게 했던 시간들까지

함께 눌러, 더 이상 흔들리지 않도록

 

그리고 언젠가

조용한 날에 책장을 펼쳐보면

 

“아, 이 꽃은 졌지만 사라지지 않았구나.”

그 고요한 안도를

내 마음도 닮아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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