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란 이름은 언제나 옳을까.
그 물음 앞에서 나는 『킬링 시저』 속 브루투스를 떠올린다.
연극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어느새 그의 어깨에 실린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시저를 죽인 배신자이자, 로마를 구하려 했던 이상주의자였다.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
공화정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아래 그는 칼을 들었다.
그러나 그 칼끝은 시저의 몸을 관통한 동시에,
스스로의 영혼도 찔러버렸다.
연극의 무대 위, 브루투스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나는 옳은 길을 택한 것인가?”
그 질문은 곧 나에게로 옮겨왔다.
우리는 누군가를 비판하고 고발하며,
마치 진실을 위해 싸우는 듯하지만
그 속에는 어쩌면 자기 확신이라는 독이 흐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시저를 죽일 때, 나는 정의가 아닌 두려움을 보았다.
무너질지도 모를 질서에 대한,
그 이후를 상상하지 못한 이상주의자의 슬픔.
그리고 그를 따르던 이들의 표정은
곧 무대를 둘러싼 관객들의 얼굴로 겹쳐졌다.
믿고 따랐지만,
그 끝이 더 나은 세상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살인은 시작이었다”는 고백은,
곧 우리 시대의 정치, 나의 삶, 관계 속 무수한 오판과 닮아 있었다.
이 연극은 정치극이라기보다 심리극이었다.
외치는 말보다, 말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더 깊은 파장을 주었다.
배우들은 단순한 고대 인물이 아니라 오늘의 인간이었다.
무대 위 조명은 그들의 그림자까지 잡아냈고,
어둠 속 침묵은 때로 대사보다 많은 말을 했다.
특히 브루투스를 연기한 배우의 숨결 하나,
눈동자 한 떨림까지 기억에 남는다.
분노 속에 감춰진 연민, 확신 속의 흔들림.
그건 우리가 이상과 현실 사이를 끊임없이
왕복하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연기였다.
그 누구도 ‘완전한 정의’를 가질 수는 없다는 것.
그 누구도 끝까지 옳을 수는 없다는 것.
연극이 끝나고 나오는 길,
나는 나도 모르게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세상은 언제나 선택을 강요하지만,
그 선택이 낳는 결과 앞에서는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는 걸
『킬링 시저』는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요즘의 나에게도 필요했다.
모든 갈등 속에서, 완벽한 해답은 없다는 걸 인정하는 용기.
때로는 이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삶을 얼마나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느냐는 것임을.
브루투스가 그랬듯, 나도 끊임없이 묻는다.
“정의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아직, 그 물음은 끝나지 않았다.
📌 정의는 때로 가장 위험한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킬링 시저』는 그 위험함을 무대 위에 그려냈고,
나는 그 안에서 나의 마음도 들여다보았다.
이상과 현실, 정의와 폭력 사이.
그 어느 쪽도 완전히 옳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을 안고 오늘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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