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노트

❄️ 눈 덮인 산을 바라보며 배우는 것

따뜻한 글쟁이 2026. 3. 1. 12:05

 

— 겨울 한라산이 건네는 말

 

세상에는 사계절 내내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어떤 존재들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제주 한가운데 서 있는 한라산이 바로 그런 산이다.

해발 1947m,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사실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그 산이 품고 있는 시간의 깊이다.

 

순상화산 위에 만들어진 거대한 산체,

정상에 자리한 직경 약 500m의 산정화구호 백록담.

그것은 단순한 자연 지형이 아니라 오랜 세월 지구가 써 내려간 한 편의 기록 같다.

 

특히 겨울이되면 한라산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눈이 내린 산은 숲과 오름,

능선의 경계를 지워버리고 모든 것을 하나로 이어 붙인다.

굴곡진 화산 지형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변하고,

나무와 바위는 서로의 그림자가 된다.

 

색을 잃은 자리에서 오히려 산의 뼈대는 더 또렷해진다.

능선의 흐름, 분화구의 윤곽, 바람이 지나간 흔적까지.

겨울은 감추는 계절이 아니라 드러내는 계절이라는

사실을 그 산은 조용히 증명한다.

 

기온이 낮고 습도가 맞아떨어지는 날이면

구상나무와 침엽수림대에는 얼음 결정이 맺힌다.

숲 전체가 하얗게 빛나는 그 순간,

산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라 하나의 장면이 된다.

해발 1500m 이상에서 눈을 머금은 구상나무 군락이 장관을 이루는 모습은,

한라산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아고산대 생태계를

품은 살아 있는 공간임을 말해준다.

 

그 풍경 앞에서는 누구나 잠시 말을 잃는다.

아름다움은 설명할수록 멀어지고, 바라볼수록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정상 백록담은 겨울에 특히 신비롭다.

눈과 얼음으로 채워진 산정화구호는 햇빛과 구름에 따라 색을 바꾼다.

 

맑은 날에는 능선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구름이 낮게 깔린 날에는 잔잔한 구름 장판 위에 떠 있는 듯한 장면이 펼쳐진다.

그 풍경을 보고 있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이며, 동시에 얼마나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인가.

 

물론 겨울 산행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기상 상황에 따라 입산이 제한되기도 하고,

성판악과 관음사 코스는 체력 소모가 크다.

방풍과 방한 장비, 아이젠 같은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모든 수고를 감수하고라도 사람들은 산을 오른다.

아마도 정상에서 보는 풍경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산을 오르는 동안 조금씩 가벼워지는 마음,

숨을 고르며 정리되는 생각, 그리고 정상에서 맞이하는 고요.

그것이 우리가 산을 찾는 진짜 이유일지 모른다.

 

짧은 거리에서 설경을 즐기고 싶다면 영실이나 어리목 탐방로도 있다.

병풍처럼 펼쳐진 능선과 눈 덮인 숲길은

멀리 가지 않아도 충분히 깊은 감동을 준다.

꼭 정상에 닿지 않아도 괜찮다. 산은 늘 말한다.

중요한 것은 도착이 아니라 바라보는 마음이라고.

 

겨울 한라산은 그래서 특별하다.

그것은 단지 눈이 많이 쌓여서가 아니라,

그 눈이 세상의 소음을 덮어주기 때문이다.

바람 소리와 발자국 소리만 남은 공간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듣게 된다.

하얀 풍경 속에서 마음속 잡음이 지워질 때, 사람은 조금 더 단단해진다.

 

어쩌면 겨울 산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도 계절처럼 변하지만, 그 변화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진짜 너라고.

 

https://n.news.naver.com/mnews/hotissue/article/081/0003619569?type=series&cid=20020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