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을 걷기로 한 날, 거창한 결심은 없었다.
그냥 바다가 보고 싶었고, 조금은 멀리 걸어보고 싶었다.
부산 오륙도에서 시작해 동해를 따라 이어지는
이 길이 그렇게 길다는 것도,
이름이 이렇게 파랗다는 것도 그때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오늘은 걷자’는 마음 하나로 길 위에 섰다.
첫걸음을 떼자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옆에서, 앞에서, 때로는 발아래에서.
파도 소리는 라디오처럼 끊임없이 흘렀고,
나는 그 소리에 맞춰 숨을 고르게 되었다.
평소보다 천천히 걷고 있다는 걸,
휴대폰을 자주 보지 않는다는 걸,
생각이 줄어들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해파랑길은 생각보다 조용한 길이었다.
유명 관광지보다 마을을 더 자주 지나고,
전망대보다 생활의 풍경을 더 많이 보여준다.
포구에서 그물을 정리하던 어르신의 손,
골목을 가득 채운 생선 비린내와 국 냄새,
무심히 건네받은 인사 한마디.
그 모든 것이 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나는 여행자가 아니라 잠시 이 동네를
통과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오르막에서 숨이 찰 때면 ‘왜 굳이 걷겠다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내리막에서는 ‘그래도 잘 왔다’는 마음이 따라왔다.
해파랑길은 내 몸 상태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길이었다.
빨리 가면 금방 지치고, 쉬면 다시 걸을 힘이 생겼다.
그 단순한 사실이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삶도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서.
길 위에서 만난 바다는 늘 달랐다.
같은 파도 소리인데도 날씨에 따라,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 변화를 옆에 두고 걷다 보니,
나 자신에게도 같은 기준을
들이대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나는 오늘의 속도로 걸으면 된다고,
해파랑길이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해가 기울 무렵, 파란 길은 주황빛을 받아들였다.
하루를 다 걷지 않아도 괜찮았다.
몇 킬로미터면 충분했고,
돌아갈 이유를 남겨두는 것도 이 길의 방식 같았다.
완주보다 기억이 더 오래 남는 길,
해파랑길은 그렇게 나에게 남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이 길을 떠올린다.
바다를 따라 걸었던 시간이 아니라,
나의 속도를 처음으로 허락했던 시간으로.
해파랑길은 바다 옆을 걷는 길이 아니라,
나에게 조금 느려져도 괜찮다고 말해준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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