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춤을 멀리서만 바라봤다.
춤은 언제나 ‘완전한 몸’이 하는 것이라고,
마음 한구석에서 정해 놓고 있었던 것 같다.
두 발로 서서, 균형을 잡고, 자유롭게 공간을 가로지를 수
있는 사람들만이 무대 위에 오를 수 있다고.
그런데 채수민의 춤을 보고, 나는 그 생각이 얼마나
쉽게 만들어진 벽이었는지 깨달았다.
그의 무대는 휠체어 위에서 시작됐다.
처음엔 나도 모르게 시선이 머뭇거렸다.
“어떻게 춤을 출까?”
그 질문 자체가 이미 내 안의 편견이었다는 걸,
춤이 시작되자마자 알게 됐다.
그의 팔이 공기를 가르며 움직였고,
몸이 천천히 기울어졌다.
휠체어의 바퀴는 리듬이 되었고, 멈춤은 숨이 되었고,
다시 나아감은 의지가 되었다.
나는 어느 순간 휠체어를 보지 않고 있었다.
그저 한 사람이, 자기 몸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남아 있었다.
그때 문득, 내 몸을 떠올렸다.
불편하다고 느껴왔던 순간들,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아 미워했던 시간들.
나는 내 몸에게 너무 자주
“왜 이 정도밖에 안 되니”라고 말해왔던 것 같다.
채수민의 춤은 나에게 이렇게 묻는 듯했다.
“당신은 당신의 몸과 얼마나 친해져 있나요?”
그는 자기 몸을 설득하지 않는다.
억지로 바꾸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가능한
움직임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래서 그의 춤은 안쓰럽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다.
나는 그 무대를 보며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춤은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너무 자주 기준을 먼저 세운다.
정상적인 몸, 이상적인 움직임, 보기 좋은 형태.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스스로 물러난다.
“나는 안 될 것 같아.”
“나 같은 몸으로는 무리야.”
하지만 채수민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말 대신 움직였고, 설명 대신 춤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나에게도 용기가 되었다.
무대가 끝났을 때,
나는 박수를 치면서 이상하게도 울컥했다.
그의 삶이 감동적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나 자신에게 너무 인색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려 한다.
내 몸이 허락하는 만큼,
내 삶이 가능한 속도로,
나만의 방식으로 움직여도 괜찮다고.
채수민의 춤은 나에게 춤을 가르쳐준 것이 아니다.
살아가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오늘 나는,
춤의 정의를 다시 배웠다.
그리고 삶의 속도를,
조금 더 나에게 맞게 조절해도 된다는 허락을
조용히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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