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하늘과 땅 사이에 아직 법이라는 이름의 문장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은 힘이 센 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약한 자의 눈물은 바람처럼 흩어졌다.
누군가의 힘이 곧 질서가 되고, 누군가의 분노가 곧 심판이 되던 때였다.
그래서 인간은 법을 만들었을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하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긋고,
힘이 힘만으로 세상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는 하늘의 신이자 신들의 왕이었다.
그의 손에는 번개가 들려 있었고, 그의 말에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질서와 정의를 지키는 존재로 여겨졌던 제우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한 가지 질문이 마음에 남는다.
힘을 가진 자가 만든 법은 정말 모두에게 공평한 것일까.
법은 누구에게나 같은 글자로 적혀 있다.
하지만 그 문장을 읽는 사람들의 삶은 모두 다르
다.
어떤 사람에게 법은 든든한 울타리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마지막 버팀목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법은 너무 멀리 있는 산처럼 느껴진다.
어디에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도움을 청할 곳도 알지 못한 채 혼자 서 있는 사람에게 법은 때로 차가운 벽이 된다.
같은 법 앞에 서 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만,
누군가는 그 한마디가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 입술을 다문다.
일터에서 부당한 일을 겪고도 참는 사람들.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하고도 다음 달의 생활비를 걱정하는 사람들.
아프다는 말조차 마음 놓고 하지 못한 채 다시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법은 과연 얼마나 가까운가.
법은 있다고 말하지만,
그 법에 기대어 설 수 있는 힘은 누구에게나 같은 크기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가끔 법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법전에 가지런히 적힌 문장일까.
사람을 잘못한 만큼 벌하는 규칙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마지막 눈물을 받아주는 울타리일까.
어쩌면 법의 가장 깊은 곳에는 사람을 향한 마음이 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약한 사람이 더 약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마음.
말할 힘이 없는 사람의 목소리를 대신 들어주는 마음.
힘 있는 사람에게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용기.
그것이 없다면 법은 아무리 많은 조항을 가지고 있어도 차가운 문장에 머물고 말 것이다.
제우스의 손에 들린 번개는 강력했다.
하지만 번개가 모든 곳을 똑같이 비추지는 않는다.
어떤 곳에는 환하게 내리치고, 어떤 곳에는 깊은 어둠만 남긴다.
우리의 법도 그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법의 힘이 약한 사람에게 더 무겁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받쳐주는 힘이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말한다.
‘법대로 하면 된다.’
그러나 삶은 법 조항 몇 줄로 설명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저마다의 하루가 있다.
아침이 두려운 사람도 있고, 월급날만 기다리며 한 달을 버티는 사람도 있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신의 아픔을 숨기는 사람도 있다.
법은 그런 사람들의 삶까지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법이 단순한 규칙을 넘어 정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의란 모두에게 똑같은 것을 나누어주는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넘어진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것.
목소리가 작은 사람의 이야기를 조금 더 오래 들어주는 것.
누군가의 삶이 힘의 크기 때문에 함부로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법이라는 이름으로 꿈꾸어 온 세상일 것이다.
신들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제우스의 번개 같은 힘을 가진 사람들과 살아간다.
돈과 권력, 지위와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여전히 묻는다.
누구를 위한 법인가.
누구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가.
그리고 가장 약한 사람도 이 법 앞에서 안전한가.
법은 사람 위에 서 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곁에 서 있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누군가 억울함을 삼키며 돌아서는 순간에도,
누군가 자신의 권리를 말하기 두려워하는 순간에도,
법은 멀리 있는 문장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오는 손이어야 한다.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제우스의 법보다 더 오래 남아야 하는 것은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려는 마음인지도 모른다고.
힘이 가장 센 사람이 옳은 세상이 아니라,
가장 약한 사람의 목소리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세상.
누구든 법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법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다시 고개를 들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이라면 법은 더 이상 차가운 글자가 아닐 것이다.
한 사람의 무너진 하루를 일으켜 세우고,
한 사람의 존엄을 지켜주며,
끝내 인간이 인간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아주 오래전 제우스가 번개를 들고 세상의 질서를 세웠다면,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어쩌면 번개가 아니라 작은 목소리인지도 모른다.
“당신의 삶도 소중합니다.”
그 한마디가 법의 가장 깊은 곳에 새겨질 때,
비로소 법은 사람을 향해 따뜻한 얼굴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의란 멀리 있는 신의 명령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존엄을 지켜주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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