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줄

유체이탈화법 — 말에서 빠진 ‘나’, 책임에서 빠진 ‘우리’

따뜻한 글쟁이 2025. 10. 23. 00:40

 

 

“유감입니다.”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이 문장들에는 주체가 없다.

 

누가 잘못했는지,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

말하는 이는 누구인지조차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유체이탈화법,

말에서 ‘나’를 제거하는 화법이다.

 

원래 유체이탈화법은 개인이 자신의 감정을 객관화하거나,

표현의 강도를 조절하기 위한 장치였다.

 

하지만 오늘날 이 화법은 개인의 심리적 완충을 넘어,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언어 전략으로 진화했다.

 

 

🧩 1. 언어에서 도망치는 주체

 

정치인의 사과문은 늘 비슷하다.

“국민께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하다.”

 

하지만 그 문장엔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가 없다.

‘심려’라는 추상적 단어가 구체적 고통을 대신하고,

‘죄송하다’는 감정표현이 ‘책임진다’는 행동을 대신한다.

 

언론 또한 마찬가지다.

“논란이 일고 있다.”,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 문장엔 ‘누가 논란을 일으켰는지’, ‘

누가 비판하는지’가 사라진다.

언어는 중립을 가장하지만,

사실상 주체의 실종을 조장한다.

 

그 결과, 말은 책임을 흐리고,

현실의 고통은 추상 속으로 흩어진다.

 

‘사람이 다 그렇지요’라는 말 속엔,

사실 ‘내가 그렇다’는 고백이 숨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나’를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순간, 책임과 감정이 모두 내 것이 되기 때문이다.

 

 

⚙️ 2. 사회가 만든 언어의 방패

 

 현대 사회는 효율을 중시한다.

감정의 진폭보다 관리의 언어를 선호한다.

 

그 결과, 유체이탈화법은 조직의 공식 언어가 되었다.

기업의 사과문, 정부의 발표문, 심지어 학교의 공지문까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라는 식으로 쓰인다.

문제는 “발생한 것”이지, “저질러진 것”이 아니다.

 

이렇게 언어는 수동태로 포장되고,

행위의 주체는 행간 속으로 숨어든다.

 

‘말’이 감정을 지우고, ‘표현’이 책임을 흐린다.

그것은 언어의 냉각이며, 사회적 감정의 거리두기다.

 

🪞 3. 철학이 묻는 질문 —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은 평범한 얼굴로 다가온다”고 했다.

그 말은, 책임 없는 언어가 결국 도덕적 무감각을 낳는다는 뜻이다.

 

유체이탈화법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말하는 나’의 자리를 잃는다.

 

결국, 주체 없는 언어는 ‘행동 없는 윤리’를 낳는다.

언어는 단순한 전달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구성하는 틀이며,

공동체의 윤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나’를 지운 문장은 잠시 안전할지 몰라도,

 

결국 공동체 전체를 무감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나’를 지우는 데 익숙해진 사회 속에서

‘우리’의 책임감마저 함께 잃어가고 있다.

 

🌱 4. 말의 주체를 되찾는 일

 

 유체이탈화법의 대안은 거창하지 않다.

그저 문장에 다시 ‘나’를 넣는 것이다.

 

“국민이 분노한다” 대신 “나는 분노한다.”

“사회가 아프다” 대신 “우리가 아프다.”

 

그 단순한 문장 속에 다시 감정이 돌아오고,

책임이 돌아오며, 공동체가 살아난다.

 

언어는 결국 인간의 얼굴이다.

말이 차가워지면 사회는 냉담해지고,

말이 솔직해지면 공동체는 다시 숨을 쉰다.

 

지금 이 시대의 과제는

‘유체이탈의 언어’를 넘어,

‘참여의 언어’로 나아가는 일이다.